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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역사

영국의 역사

by 나데로 2008. 2. 22.

 

 

□ 원주민 이베리아인

 

영국으로 들어온 최초의 이주민으로 이베리아인이 있는데 스톤헨지를 세웠다.

그 숫자가 많지 않아영국의 첫 이주민으로 켈트족을 주로 예기한다.


 

□ 브리튼 섬의 첫 번째 주인 켈트 족

 

켈트족이 브리튼 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기원전 700년이야. 그리고는 기원전 500년경,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쯤에는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지.

켈트 족의 일파인 게일 족은 나중에 북쪽의 고지대로 올라가 스코틀랜드 인이 되거나, 아예 바다를 건너가 아일랜드 인의 조상이 되었지. 또 다른 일파인 켈트계 브리튼 인들은 중부와 남부에 넓게 퍼져 살다가 서쪽 산간 지방으로 들어가서 웨 일스 인의 조상이 되었어.

 

 

□ 로마 제국과 브리타니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이름을 높였던 영국도 한때는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아니, 누가 영국을 다스렸냐고? 그건 바로 대영 제국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떨쳤던 ‘로마 제’이야. 서양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세워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유지했고, 서양에서 ‘제국’이란 말과 ‘황제’라는 말을 만들어 낸 나라, 그래서 유럽의 모든 나라들을 한 번쯤은 식민지로 삼았던 로마 제국이 바로 그 주인공이지. 로마 인들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브리타니아’를 정복했어. 사실 이 브리타니아라는 말도 ‘브리튼인의 나라’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였고, 이후 영국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로마가 영국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만해, 그렇지?

 

첫 번째 침략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 시저야. 그는 기원전 55년에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브리튼 섬에 당도하였고, 그 때는 못 당해내서 후퇴하였지만 그 이듬해, 더 큰 부대를 이끌고 와서 제 2차 침략을 시도한 시저는 결국 켈트족을 굴복시켰어.

 

제 3차 침략은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서기 43년에 일어났어. 훨씬 더 강해진 로마 군대는 전보다도 손쉽게 켈트 족을 정벌한 다음 브리튼 섬에 군대를 주둔시킨단다. 이로써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속주, 즉 식민지가 된 거지.

 

 

□ 400년 동안의 지배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긴 했지만 로마 인이 가지고 들어온 문명은 브리튼 섬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어. 무엇보다 영국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도 로마 인이 라틴 어로 쓴 역사책을 통해서였지. 로마식으로 집을 짓는 등 로마 인이 가지고 들어온 문명들이 더욱더 많이 있어. 브리튼 섬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400년이 지나자 로마는 점점 쇠약해졌어. 넓은 영토를 모두 다스릴 수 없을 지경에 처한 로마 인들은 짐을 꾸려 브리튼 섬을 빠져나왔지. 그러자 눈치를 보고 있던 앵글로색슨 족이 슬금슬금 넘어 오기 시작했지. 또 앵글 족과 색슨 족, 주트 족이 넘어왔지. 이 중에서 앵글 족과 색슨 족은 켈트 족을 지금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로 밀어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했어. 그 유명한 아서 왕 이야기도 앵글로색슨 족에 대항해 싸우는 켈트 족에 관한 이야기이지.

 

 

□ 사납고 무서운 앵글로색슨 족

 

잉글랜드를 제외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사람들이 조상이 켈트 족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잉글랜드 사람들의 조상은 누구일까? 바로 앵글로색슨 족이야.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종족은 아니었고, 넓게 보아 지금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스위스 등지에 퍼져 살았던 게르만계 종족이었지. 앵글로색슨 족은 5세기경, 즉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에 브리튼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지. 앵글 족이 처음으로 정착한 지역은 브리튼 섬의 남동쪽, 템스 강의 위쪽인데, 지금은 ‘이스트 앵글리아’라고 불리는 곳이야. 이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게르만 족의 일파로서 덴마크 쪽에 살던 ‘주트 족(유트 족)’도 슬쩍 브리튼 섬에 이사를 왔어.

 

로마가 멸망할 무렵 힘에 부친 로마는 잉글랜드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때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방으로 쫓겨 살던 켈트족은 이때다 하고 잉글랜드 지역을 침입하게 되고 잉글랜드 주민들은 앵글로족에서 도움을 요청하게되고 잉글랜드에 도착한 앵글로족은 살기좋은 잉글랜드 땅을 보고 오히려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지역으로 쫓아내게 된다.

이를 본 인근 지방에 살던(독일의 작센 지방) 섹슨인도 들어와 잉글랜드 지역을 나누어 차지하게 된다.

 

 

□ 영국의 삼국 시대

 

앵글로색슨 족은 당시 브리튼 섬의 주인 행세를 하던 켈트 족을 산악 지대인 북쪽(스코틀랜드)과 서쪽(웨일스)으로 쫓아내고 가장 넓고 살기 좋은 잉글랜드 평원을 차지했어. 그리고 빼앗은 널찍한 평원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 이 소문을 전해들은 다른 앵글로색슨 족들도 얼씨구나 하며 건너오게 되자 그 수가 급격히 불어났어. 그 결과 6세기를 지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앵글로색슨 족의 작은 왕국들이 세워졌지. 이로써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로 이뤄진 영국판 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던 것이야.

 

 

□ 야심가 윌리엄

 

1066년 9월,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되고 있던 프랑스의 노르망디.

당시 노르망디는 윌리엄 공작의 영지로, 윌리엄 공은 명목상으로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이지만, 왕도 넘볼 수 없는 독립적인 주권을 지닌 공국, 즉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의 지배자였어. 이때는 노르망디에서 군사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열기가 드높았어. 바로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거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단다.

 

1.에드워드 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25년 동안이나 노르망디에 도망쳐 윌리엄 공의 신세를 졌단다. 그 빚 때문인지 에드워드는 나중에 자기가 왕이 되면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사촌인 윌리엄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는 거지.

2.해럴드 고드윈, 즉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막 웨식스 왕국의 왕위에 오른 해럴드 2세도, 1065년 무렵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당시에 윌리엄에게 그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야.

 

 

□ 또 다른 후계자, 바이킹의 후손


 

바이킹의 후손, 노르웨이의 왕 해럴드 하드라다가 왕이 계승에 경쟁자로 끼어들었단다. 그 또한 자신만이 잉글랜드 왕이 될 자격이 있다며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어. 해럴드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미 잉글랜드에 뿌리를 내렸던 바이킹 족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지.

 

 

□ 왕위를 둘러싼 경쟁

 

일단은 두 명의 해럴드가 먼저 맞붙었어. 그들은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붙었는데, 여기서 해럴드 고드윈이 승리를 거둔단다. 9월 28일, 윌리엄 공은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어. 그 후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길까 궁리한단다. 그렇지만 승리의 기쁨에 겨웠던 해럴드는 빨리 다른 경쟁자를 없애 버리고 싶어서 남쪽으로 내려왔어. 이 결정적인 해럴드의 실수로 해럴드는 전투에서 지고, 윌리엄은 마침내 승자가 된단다.

 

윌리엄 공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게 돼. 아, 그리고 ‘정복자 윌리엄’이 열어젖힌 영국의 중세가 시작되었단다.

 

 

□ 중세가 시작되다

 

윌리엄2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긴 했지만 잉글랜드 전체를 못했어. 잉글랜드 전역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거든. 그는 1870년에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 전역을 돌아다니며 반란을 진압하고 색슨 족의 왕국들과 데인로를 모두 합쳐 하나의 잉글랜드를 만드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어.

 

 

□ 중세 영국의 봉건제

 

윌리엄과 함께 중세가 시작 되었다는 것은, 영국의 ‘봉건제’가 시작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봉건제도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단다.

어떠니? 피라미드 같지. 그 뜻은 가신들이 영주에게, 농노들이 가신들에게 바치는 것과 같단다. 다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고생

은 심해졌어. 특히 가장 아래 계급인 농노는 가신과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물론 온갖 궂은일까지 마다할 수 없었지.

 

 

□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

 

윌리엄 공에 의해 잉글랜드가 정복당하고 난 다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윌리엄 공은 노르망디의 공작이자 잉글랜드의 왕이었으니까. 윌리엄의 (셋째아들의 아들) 손자가 바로 헨리2세란다. 그는 프랑스 남서부의 광활한 지역인 아키텐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땅을 지배하게 됐어.

 

잉글랜드와 합치면 프랑스 왕보다도 영토가 넓을 지경이었지. 당연히 프랑스 왕의 속이 쓰렸겠지? 하지만 1216년 존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땅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어. 그 후 영토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잉글랜드는 1337년에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꼬투리 삼아 전쟁을 일으켰어. 이 기나긴 전쟁을 거치면서 잉글랜드는 차츰차츰 예전의 땅을 회복하는 대신 프랑스는 국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기게 된단다. 하지만 17세의 소녀 전사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왕위에도 오르지 못했던 샤를 7세에게 ‘오를레앙’이라는 곳을 되찾아 주지. 그러면서 19살이 되자 잉글랜드 손에 넘겨지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어. 그렇지만 승자는 바로 샤를 7세가 되었단다.

 

 

□ 이름만큼 예쁘지는 않은 전쟁

 

영국의 중세는 노르만-플랜태저넷 왕조, 그리고 랭커스터-요크왕조에 의해 대략 300년 동안 지속되었어. 이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바로 ‘장미 전쟁’이란다. 장미 전쟁이란 가장 힘이 센 두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맞붙어 싸운 전쟁을 가리킨단다.

이 전쟁에서는 랭커스터 가문이 이기게 되었는데, 요크가를 대표하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단다. 그로서 그들의 장미전쟁은 비로소 끝이 나게 되지..

 

 

□ 헨리 8세는 결혼반지가 여섯 개!

 

헨리 7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 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이 왕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헨리 8세란다. 그는 무려 6번이나 결혼을 한 것으로 유명해. 그리고 더 유명한 것은 그 여섯 번의 결혼이 영국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것이란다.

 

첫 부인은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메리라는 딸을 얻었단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은 예쁘지만 사형당했고, 세 번째 부인은 왕자를 낳았지만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못해 죽었고, 네 번째 부인은 퉁명스럽다고 이혼 당했다고 해. 그런다음 다섯 번째 부인은 옛날 애인을 잊지 못해 몰래 만나다 발각나는 바람에 사형당했고,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은 캐서린 파. 그녀는 첫째딸 메리와 둘째딸 엘리자베스에게도 잘해주라고 설득하기도 하였대.

 

 

□ 배다른 세 남매 왕의 사연

 

 

제일 먼저 왕이 된 에드워드 6세, 그는 유일한 아들이지만 병약했고 최초의 명실상부한 ‘신교도’ 국왕이었대. 그런데 병약하고 많이 아프기도 해서 한 번도 왕다운 왕으로서의 역할도 해 보지 못한 채 10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어.

그런 다음 서열 2위였던 피의 여왕 메리는 여왕이 되자마자 국교를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바꾸려고 했어. 그리고 그 로마가톨릭국가인 에스파냐의 왕인 펠리페 2세와 결혼했대.

 

그리고는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개종과 결혼을 거부하는 300명 이상의 신교도들을 불에 태워 죽였어. 그래서 그녀는 역사에 ‘피의 여왕 메리’라고 쓰여져있대.

 

마지막으로 서열 3위였던, 아무도 그녀가 여왕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자 이제까지 메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신교도들은 뛸 듯이 기뻐했지.

 

그녀는 종교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을 했고, 외국 왕들의 청혼을 받아들일 듯 말듯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자리를 이용했어. 세 번째로 그녀는 무척 검소한 군주였대. 평소에 국고를 철저하게 관리해서 국민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을 수 있었대. 또 그녀는 드레이크를 시켜서 해적질을 하게 하여 영국이‘바다의 왕자’가 되게 하였지.

 

 

□ 폭풍처럼 휘몰아친 변화의 바람

 

이 시기 영국에서 발생된 커다란 변화들은 다음의 세 단어로 요약이 될수 있어.

‘개혁’, ‘혁명’, ‘복고’.

이 세 가지는 현대의 영국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 낸 동력이라고 할만하단다. 지금부터 16세기부터의 중요한 사건들을 알아볼까?

 

종교개혁은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성직자였던 루터로부터 시작되었어. 루터는 면죄부를 팔이 돈을 버는 로마 가톨릭이 저지르는 부패가 극을 달했다고 비판했지.

 

1701년, 영국에는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일이 벌어졌어. 의회가 ‘왕위계승법’이라는 법이지. 이런 것들은 당시로서는 아주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내용이었어. 이런것들을 계기로 영국은 지도자들이 발 빠르게 손을 써서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 내는 영국식 문제 해결법의 특성이 시작된 것이지.

 

 

□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드디어 ‘근대’가 시작 되었어. 그리고는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 그리고 제 1차 세계 대전은 영국 등의 승리로 끝난단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유럽의 질서를 크게 바꾸었대. 그런 다음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어.

 

바로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지. 식민지 쟁탈에 나선 열강들이 또 전쟁을 벌인 것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영국 등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어. 제 1차, 제 2차 세계 대전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지위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

 

 

□ 늙은 사자의 코털

 

영국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분명히 그 세력이 축소 되었어. 하지만 비록 늙은 사자로 한걸음 물러나 있기는 해도 그 위세를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으로 보여주었지.

 

영국이 아무리 늙은 사자라고 해도 그것이‘사자’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준대. 우리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단다. 알겠지? 항상 세심하게,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