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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역사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조)

by 나데로 2008. 1. 25.

                    그림출처 : 두산백과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을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른다.

메소포타미아의 패자로 등장한 페르시아 왕국은 처음에 우르미아 호수 서남쪽에서부터 힘을 길러 리디아의 크로에수스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다.

유명한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백22년-4백86년)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키로스(재위 기원전 5백59년-5백30년)의 인척으로 각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고 명실공히 대제국의 왕으로 군림한다.

 

사상 최고의 제국 페르시아

다리우스는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해 공물과 세금을 거뒀으며, 이를 위해 총 2천6백98km에 달하는 ‘왕의 길’을 건설했다.

중간 중간에 가장 빠른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역참이 1백11장소가 있었는데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긴급한 서류가 1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이런 제도는 페르시아를 사상 최고의 제국으로 만든다.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에 패배한다.

전쟁의 결과로만 따지면 결코 대제국의 기초를 뒤흔들만한 큰 사건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에 패배한 후에도 1백50년 동안 계속 왕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리우스 3세는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알렉산더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정면 승부를 하다가 기원전 3백30년 이란고원에서 자살함으로써 페르시아 대제국은 영원히 막을 내리고 알렉산더로 하여금 세계의 패자가 되도록 한다.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전경

 

 


각국의 문화와 전통 존중

페르세폴리스는 가로 3백m, 세로 4백50m의 거대한 단구(호수나 바다의 연안에 생기는 계단 모양의 지형) 위에 세워졌으며 주변이 잘 보이는 라흐카트산에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궁으로 들어가는 ‘만국의 문’이 있는데 매년 초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이 문을 통해 본궁으로 들어갔다.

페르세폴리스에는 여러 궁전들이 있다.

다리우스 궁전, 크세르크세스의 궁전, 아타르크세르크세스 궁전과 무덤, 하렘 등이 있고 중앙에 아파다나궁(사절단을 접견하던 곳)이 있으며, 요소 요소의 계단 벽에 많은 조각들이 있다.

알렉산더는 3백31년 다리우스를 격파한 후, 페르세폴리스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페르시아의 요충지임을 감안해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페르시아는 원래 이란 고원의 작은 곳에서부터 출발한 기마 민족이므로 자신이 점령한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 비해 문화 수준이 낮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복한 이들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했으며, 페르세폴리스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궁정은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위에 계단식으로 지었는데, 이는 바빌로니아식이고 궁성 정문 양옆에 설치한 라마수는 아시리아식이다. 궁내의 넒은 공간에 설치한 열주(줄지어 늘어선 기둥)는 이집트에서 도입한 방식이다.

비록 각국의 다양한 기법을 조합해 만들었지만, 왕궁 전체로서는 높이 20m에 달하는 열주를 비롯해 장대함과 힘찬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들이 제국 시대의 문화적 요소를 나름대로 조화시켜 대제국의 위엄을 뽐내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페르시아 전쟁

BC 492년부터 BC 448년까지 지속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전쟁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연합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는 그리스 쪽으로 세력을 뻗쳤다. 이에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두 세력이 맞서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국력이 더욱 번창 하여 민주 정치와 문화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 스파르타 VS 페르시아 전쟁

정식 명칭이 테르모필레 전투랍니다.(다른 말로는 뜨거운 문 전투라고도 하더군요)

페르시아가 침공했을 당시 스파르타는 레오니다스(당시 스파르타 왕)가 이끄는 3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싸우게 되죠.

그리스의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스파르타 군인들의 정신 자세와 협곡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덕택에 페르시아 군은 악전고투를 거듭하게 되죠.

그러다가 어느 밀고자로 인해 후방이 가로막혀 결국엔 레오니다스를 위시한 300명의 결사대는 모두 죽게 되고요.

결국엔 졌습니다.

페르시아 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엔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셈이지요.

페르시아를 최종적으로 물리친 전투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제독이 이끄는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 스파르타의 멸망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집권으로 이른바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델로스 동맹이라는 것을 맺어 동맹의 맹주가 되었고, 이는 곧그리스 전체의 패자(覇者)나 다름없었지요.

이러한 아테네의 성장에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이 바로 스파르타입니다.

스파르타도 나름대로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맺게 되는데요 이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격심한 갈등 끝에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일명 '그리스의 자살'이라고 불리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전쟁을 치뤘으니 승자가 누구라 하더라도 결코 이긴 게 아니죠.

쌍방의 국력이 소모될 대로 소모됐을 테니까요.

하지만 결과적으론 이 전쟁에선 스파르타가 이깁니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그리스의 패권도 오래지 않아 테베에게 빼앗기게 되고, 끝으론 북방 야만족이라 천시하던 마케도니아에 의해 그리스 전역이 멸망하게 된답니다.


 

영화 '300'과 페르시아 전쟁의 이해

그리스는 해안선이 복잡하고 산지가 많아 많은 폴리스(도시국가)들이 성립합니다.

그 폴리스 중 대표적인 폴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죠.

영화는 스파르타가 철저한 교육을 통해 강인한 군인을 키워가는 과정으로 시작된답니다. (스파르타는 소수의 도리아인이 원주민 다수의 이오니아인을 정복하고 세운 폴리스라 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강인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약한 아이들은 버려졌으며 7살에 공동교육을 받는 모습, 성년식을 치루기 위해 굶주린 늑대와 싸워 이겨야 하는 모습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아직도 스파르타 하면 스파르타교육을 떠올리죠.

또 강인한 군사를 출산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여성들도 강인한 모습을 갖고 있죠.

실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 주변의 그리스 식민지를 지배하며 그리스와 충돌이 생겨 3차례나 그리스에 쳐들어 옵니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왕 금으로 장식한 여러 장신구와 신하들을 발로 밟는 모습 등 전제군주의 전형)


- 3차례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


첫번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때 처들어 오나 풍낭을 만나 패전했고, 다시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옵니다.

이것을 세계사 책에는 마라톤 전투로 표시하고 있죠.(2차 페르시아 전쟁)

여기서 대군 페르시아를 무찌른 후,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소식을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달려 근대 올림픽부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 경기가 생겼다죠.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데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가 다시 10년만에 쳐들어온 전쟁으로 영화'300'과 역사를 조합해 보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통일하여 대제국을 이루면서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도 사신을 보내어 '흙과 물'을 바치라고 강요합니다.

이에 아테네는 사신을 묻어 버리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사신을 우물에 빠트려 죽이죠. 결국 페르시아와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이는 세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과 관련이 있는듯...)

당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돈을 받은 의원이 배신하고, 신탁을 조정하여 전쟁을 절대 못하도록 하고 결국 왕은 자신의 친위부대 300명을 데리고 데르모필레 협곡으로 가죠.

거기서 페르시아의 많은 대군을 계속적으로 상대하고 용감하고 치열한 대결이 이루어지나 결국 왕과 300인은 모두 사망하게 되죠...(데르모필레 전투)

이때 왕의 열망을 담아 한 병사가 왕의 뜻을 전하여 의회를 움직이고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군대를 움직여 1년후 3차의 페르시아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육로와 해로로 처들어 오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합군이 살라미스에서 크게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답니다.

영화를 통해 당시의 스파르타의 이해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잔인한 묘사, 페르시아인들을 지나치게 비하하여 그린 모습 등으로 이란이 크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던 다양한 사고를 담고 있어 좋은 영화로 추천하기는 좀 부족한 점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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