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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역사

페니키아

by 나데로 2008. 1. 24.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페니키아인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000년대 고바빌로니아 시대이다.

당시 중동을 두개로 나누어 지중해 동안 그러니까시리아 지역은 페니키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바빌로니아가 지배하고 있었다.

 

남부에는 이집트가 있었고 북쪽에는 히타이트를 위시한 아리안이 초기의 약한 세력을 형성할 때이다.

이 지역들의 합이 바로 오리엔트 세계이다.

페니키아는 지중해 해상 무역을 하는 매우 상업적인 민족이었다.

 

유태인의 상업적 기질이 인접한 페니키아로부터 익힌 것일지도 모른다.

페니키아인은 상업적 용도를 위해 알파벳을 만들었다.(훗날 그리스인이 페니키아로부터 알파벳을 배운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수메르인이 쐐기문자를 이용하여 이미 상업적 용도로 점토판에 문자를 세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이집트도 상업적인 용도는 아니었지만 종교적 용도로서 상형문자를 개발한 상태였다.

페니키아는 시돈, 티루스, 우가리트, 비블로스 등의 도시국가 연맹체였다. 이것은 훗날의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맹체와 비슷하다.

그리스도 아테네, 코린트, 올림피아, 테베, 티린스 등의 연합이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지중해해상은 오리엔트와 유럽 세계의 활발한 무역의 장이었다.

이집트와 미케네, 페니키아(메소포타미아의 대표)의 3지역의 삼각 무역이 활발하였고각지에서 기술이나 무역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 해적이 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북아프리카나 사르데냐, 그리스 섬들에서 해적들이 출몰하였다.

기원전 1500년대에 이르면 북쪽의 히타이트와 기타 아리안이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한 탓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맹주는 이제 바빌로니아가 아니라 아리아계의 미탄니와 카시트였다.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시리아 종주권 싸움으로 페니키아는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 시기 시리아의 대부분이 수시로 히타이트나 이집트의 지배하에 들었으므로 페니키아 또한 공물을 바치며 간신히 독립을 유지해야 했다.

기원전 1200년대에 이르면 서쪽 지중해 건너에서 출몰한 필리스티아인의 오리엔트 침공은 페니키아를 멸망직전으로 몰고 갔다.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이집트가 남방 야만족에게 정복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페니키아는 뛰어난 연맹체의 수완으로 살아남았다.

 

기원전 900년대에 이르면서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 식민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오랜 축적된 경험과 경제구조체제를 형성키 위하여 형성된 이 도시들은 북아프리카, 스페인,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에 있었고

 

 

 

 

기원전 700년대 중반에 드디어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가 세워진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은 사이스 왕조 이집트(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한 리비아계 왕조)의 파라오 네코 2세의 지원을 받아 세계최초로 아프리카 일주항해를 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본토인 시리아가동쪽에서 일어난 신흥 강국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았다. 아시리아는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북쪽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통일한 상태였기 때문에 페니키아인의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페니키아인의 본토 도시국가들이 아시리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망해가는 제 각기의 나라를 보면서 페니키아 유민들은 탈출하여 자신들의 식민시로 바다 건너이주했다.

본토의 페니키아가 멸망했고 대부분의 페니키아인들은 카르타고로 이주하였다.

본디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식민시 중 하나였으나 본토가 멸망한이후에는 새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카르타고와 그리스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상업 경쟁의 라이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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